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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해동공자 최충의 유래
공자 이전의 중국은 원시적인 무속신앙이 성행했으나 공자의 교육을 통하여 인문을 개화하고 학문의 보급을 대중화하면서 문명의 시대를 열어 시속을 개화하는 전기가 되었다. 고려 광종이 쌍기를 기용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려 했으나 그의 문학은 화려한데만 치우쳤고, 거란군의 계속된 침략으로 민생은 피폐하여 문교가 긴요한 때였다. 최충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현종 덕종 정종 문종의 왕조에서 60여 년간 벼슬하며 문덕정치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했다. 최충은 퇴임 후 높은 학문과 해박한 경륜을 기반으로 재산을 출현하여 구재학당을 창립하고 신분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선발하여 유학교육에 진력했다. 최충선생은 그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솔선수범하였기에 교육내용은 성인을 흠모하고 본받게 하는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 등 아홉 개의 학당을 두고 생도들에게 구경과 삼사(九經三史)를 강론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이에 동방학교의 흥성이 시작되고 성현의 교육이 성하여 고려가 동방예의지국이 되었다. 최충선생이 별세하자 문종은 조문에서 백성들이 문명하고 개화하는데 초석이 되었음을 추모하며 국사를 논의하던 꿈이 [孔子의 죽음]이라고 애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 백성들은 사학의 시조인 최충선생을 중국의 孔子에 비견하여 해동공자라 호칭하였다.

2.정신적 규범의 실천이 되는 계이자시(戒二子詩)
최충선생은 두 아들에게 계이자시를 남기었다. 선비가 세력으로 출세하면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이 드물고 文德으로 영달해야 경사인 것이라고 훈계하니 최충선생의 후학들에게도 정신적 규범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吾今戒二子 付與吾家珍
이제 두 아들에게 훈계하노니, 우리 집안의 보배로 삼아라.
淸儉銘諸己 文章繡一身
청렴과 검소함을 각자 몸에 새기고, 문장으로 온 몸을 장식하여라.
傳家爲國寶 繼世作王臣
집안에 전하여 나라에 보배가 되고, 대를 이어 어진 신하가 되어라.
莫學紛華子 花開一向春
사치와 허영은 배우지 말라, 꽃은 봄을 향해 한동안 피느니라.
家世無長物 惟傳至寶藏
집안에 전하는 귀한 물건은 없으니, 오직 지극한 보배로 간직하여 전하라.
文章爲錦繡 德行是珪璋
문장으로 부귀(錦繡)를 누리고, 덕행으로 공명(珪璋)을 이루어라.
今日相分付 他年莫敢忘
오늘날 너희에게 분부하노니, 두고두고 감히 잊지 말거라.
好支廊廟用 世世益興昌
나라에 동량으로 공헌하며, 자손만대에 더욱 흥하고 창성하여라.

3.학업에 정진하게 한 각촉부시(刻燭賦詩)
각촉부시(刻燭賦詩)란 구재학당에서 매년 여름 개성 탄현문밖에 있는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여름 수업을 열고 저명한 학자나 선배들이 들르면 생도들과 함께 초에 금을 긋고 초가 타는 시간 내에 시를 짓게 하여 읊는 대회를 말한다. 이때 우수작을 벽에 걸고 차례로 불러 앉혀 술상을 베풀었는데, 진퇴의 절도와 장유의 서열이 분명하고 종일토록 수창(酬唱)하는 모습이 매우 절도 있고 질서 정연해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교육 결과 학생들은 과거시험에서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또한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을 최충의 벼슬 이름을 따 흔히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 일컬었으니, 공의 사후(死後)에도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칭하였다. 각촉부시는 학업을 정진시킨 훌륭한 교육이었다. 이러한 시 짓기에 대한 관심은 조선시대 교학풍토(敎學風土)에도 그대로 이어져 세조 13년 경회루에서 친시(親試)를 보았는데 각촉(刻燭)으로 짓게 하여 4인을 뽑았으며 중종 31년에도 친시를 열어 각촉시(刻燭詩)로 허경(許坰) 등 4인을 선발하였다. 각촉시라는 말도 이때부터 유래되었다.

4.문헌서원(文憲書院)의 유래와 주세붕의 제문
문헌서원은 문헌공 최충 선생과 문화공 최유선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고려 때부터 황해도 해주 신광천 위에 있었다. 1550년(명종5) 황해도 관찰사 周世鵬과 해주목사 鄭希弘이 문헌서원을 해주향고 서편으로 옮겨 영정을 모시고 조선 명종의 윤허를 받아 제향을 올리던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다.

[주세붕의 제문]
옛적 고려가 나라를 세운지 150년이 지난 시기에 사람들은 사욕(私慾)에 가득 차 있었고, 하늘의 이치는 아득하기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이를 슬퍼하여 공을 우리나라에 보내주셨습니다. 도덕(道德)으로 몸을 장식하셨고, 패술(覇術,권세로 굴림함)을 배척하시며 왕도(王道)를 주창하셨습니다. 혼탁한 세상을 깨끗하게 변혁시키시니 이로 인하여 나라가 번창해 갔습니다. 학도를 육성하여 문학엔 선비가 가득하였고, 혜택이 자손에 미쳐서 끝없이 많은 복을 누렸습니다. 마침내 속세에 싫증을 내어 후련히 옷자락을 하늘로 날려서 누른 학(鶴)을 타고 다시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시는 집을 가지고 학교를 세우셨더니 구재(九齋)에는 잡초가 우거졌습니다. 서해(西海)는 넓고 넓으며 수양산(首陽}山)은 높고 높습니다. 공이 가신지 480년! 저는 백발을 흩날리며 공의 고장을 찾아왔습니다. 마루위에 모슨 공의 화상을 뵈옵고 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합니다. 향기로운 제물로 정성을 올리오니 용(龍)과 봉(鳳)을 타고 내려오셔서 저의 술잔을 받아 주소서.

5.文敎로 고려사회를 변화시킨 문헌공도
고려 전기는 거란의 연이은 침입으로 사회가 무질서 하였고 전쟁으로 인해 무신들이 득세하여 국가 질서가 흔들렸다. 또한 왕실과 외척의 전횡도 심해 많은 정변이 있었다. 이러한 혼란기였던 고려정치사회에서 질서와 법도를 바로 세우고 정체된 고려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문화와 교육, 즉 문교(文敎)였다. 최충선생은 높은 학문과 해박한 경륜을 기반으로 문헌공도들을 열심히 가르쳤는데 그 제자들이 과거시험에 많이 합격하여 고려 사회를 이끌어가는 훌륭한 관료로 성장하였다. 문헌공도들이 관료로 성장한 후 고려 문종대에 문화적 융성과 함께 고려사회는 새로운 변화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문헌이란 시호는 고려 조정에서 시법(諡法)에 의거 시호(諡號)를 논의한 바 학문과 도덕을 펼친 공덕을 문[文]이라하고,多能하며 법률을 고정한 공덕을 헌[憲]이라 정하여 시호를 문헌(文憲)으로 정한 것이다. 최충선생은 치사한 이후에 문헌공도를 창설하여 교육활동을 하게 되는데 문헌공도의 학맥은 김양감, 김인존, 윤관, 윤이언, 김부식 등에게 계승되어서 고려 전게 유학계를 형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