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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공자 최충 선생 영정


오산 文憲書院 影幀閣의 影幀을 고쳐 모시다

영정대책소위원회 위원 崔康勳최강훈


선조의 影幀(영정)은 宗門의 상징으로 종교에서의 聖像(성상)과 조금 다른 의미를 지녀 이를 올바르게 모신다는 것이 쉽지 않아 때로는 시비꺼리가 될 수도 있다. 현대의 대종회가 구태를 벗고 다시 태어난 오늘날 장차 가야할 먼 앞날에 비추어 볼 때 그 초기에 어찌 아쉬움이 없겠나만 그 중에서도 영정 모시는 일에 문제가 있다면 그 일은 첫 번째로 꼽혀야 되지 않을까. 지금 우리 문중의 영정이 곳에 따라 다르게 모신 현실, 왜 이렇습니까? 이 전말의 대강을 다음과 같이 풀어보고자 한다.

오산시 文憲路(문헌로)의 文憲公園(문헌공원)내 影幀閣(영정각)에는 文憲公 2世 崔冲(984~1068)선생과 두 아드님이신 3世 惟善조(1010~1075)와 3世 惟吉조( ~1094)의 세 영정을 1990년대 초 영정각이 처음 건립되면서 새로 창작된 화상으로 오늘날까지 모셔왔다. 그러나 그 때부터 화상의 근거를 알 수 없는 영정이라는 이유로 종친들 간에 불만이 팽배해 왔다. 그 이유는 현재 여러 지방종회에 모신 영정은 서로 같다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서로 같은 원본을 모사했거나 유사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새로 모신 오산서원의 세 영정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지난 10년 동안 대종회의 年例行事로 地方宗門을 巡訪한 이후에 이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고. 日本國 天理大學에 문화공의 영정이 소장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2013년 1월에 승군 회장님이 任員 두 사람을 현지에 파견하여 직접 文和公영정(상반신 모사, 19세기 제작)을 확인하고 그 模寫(모사)본을 입수하여 그 영정 중 하나를 김포 문덕재에 모셔놓고 보니 역시 여러 지방에 모신 영정(魯東書院의 영정의 모사)들과 복색이 다르지만 화상과 관복의 차림에는 공통점이 들어나 보였다.

이에 影幀 改模(개모)에 대한 所信을 세우신 승군 회장님은 대종회운영위원희의 승인 하에 국내 주요 계파의 대표들을 포함하는 “영정대책소위원회”를 구성하시니 영정을 그려서 모시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영정대책소위는 약 1년간 畵家(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탐방 비교하고 토론을 거듭한 끝에 우선 제작을 담당할 화가를 선정하여 일에 착수케 하며, 한편으로는 지방의 파종회와 독지가들의 獻誠(헌성)을 모으는 일에 착수하였다. 사업은 순조롭게 진척되고 이듬해 2015년 2월 7일 드디어 오산영당에 세분의 새 영정을 모두 바꾸어 모시게 되었다. 그 과정과 취지는 아래와 같다.

1. 현존 영정의 구분과 유래
(1) 魯東書院(노동서원)에 모신 문헌공(冲)조, 문화공(惟善조)의 두 분 영정은 英祖24년(1748)에 해주문헌서원에서 모사해 온 모사본으로 지금은 많이 낡아 하루 소히 重修(중수)해야 할 형편이다.화순의 茶山影堂(다산영당)은 인조2년(1624)에 창건되고 영정은 충남 홍성에서 모사해왔다고 하였고, 그 화상은 역시 해동영단의 영정과 많이 닮았다. 후에 문청공 滋(자)조의 영정도 모셨다고 했다. 당진의 海東影堂(해동영당, 구 沔川영당)은 宣祖(선조) 때에 건조되고, 영정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화상과 향방 등은 로동서원의 영정을 닮고 있으나 검은 관복에 무늬가 있어 보이는 것이 특색이다. 김포의 文德齋(문덕재)는 경오보(1990) 첫머리의 영정을 모사했고, 담양의 三賢影堂(삼현영당)에 문헌공과 문화공의 영정을 모시고 또 파조이신 진사공 尹望조의 영정도 모셨으나 대체로 로동서원의 화상과 맥을 같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상 영정의 화상과 향방 등은 대체로 로동서원의 영정과 유관한 것으로 분류된다.

(2) 한편 영천의 大東影堂(대동영당)에는 1962년에 경기도 長湍影堂(장단영당)으로부터 문헌공, 문화공의 영정을 모셔왔다. 함께 모신 영정은 이전에 해주 凜然祀(늠연사)에서 모셨던 월담 滉(황)조와 秋峰 有源(추봉 유원)조의 영정도 함께 모셔왔다. 화상은 좌상이란 점이 다를 뿐 여타는 대체로 魯東書院의 영정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3) 일본국 나라현에 있는 天理大學(천리대학)에 소장된 문화공 영정은 平章事 시절의 관복차림으로 복색은 분홍이고, 上半身 영정이나 풍모, 홀, 옷깃, 소매 등은 거의 이상 영정들과 같다.

(4) 庚午譜(경오보)의 채택; 1990년에 庚午譜(경오보) 발간 시에 편집위원회는 魯東書院의 두 영정을 그 첫머리에 사진판으로 싣고 있다.

2. 攝尙書令 惟吉(섭상서령)공의 화상과 시호
攝尙書令 惟吉공의 영정은 어느 곳에도 없어 부득이 가족 간에 근사한 화상으로 창조하며 화상에 표기된 내용에는 諡號(시호) “文壯公”은 쓰지 않았다. 이유는 正史(고려사, 묘지명 등)를 비롯한 모든 기록에 시호는 없으며 “攝尙書令”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이 관직을 표기한다. 학계에서 논하는 惟吉조께서는 門蔭(문음, 과거를 거치지 않고 家勢로 출사함)으로 관직이 최고직까지 올르신 어른이시기에 이 영정에 시호를 쓸 수 없음.
註; 中書令(중서령, 수상)과 攝尙書令(섭상서령, 행정수반)의 품계는 같은 從一品으로 宰相(재상)이며 高麗朝(고려조)의 科擧(과거)와 무관하게 實職(실직)으로서는 最高官職(최고관직)임.

3. 畵法(화법)
화법은 비교적 섬세한 동양화법으로 하고 규격은 현 영정과 같게 하며 복색은 약간 엷게 했다. 고려사 기록에 조정의 관복색은 짙은 紫色(자색)도 있고 분홍색도 있다.

4. 原本(원본)의 선택
화상의 근거는 영조24년(1748) 海州文憲書院(해주문헌서원)으로부터 模寫(모사)해 온 노동서원(강원도 홍천군 서면 소재)에 모신 문헌공과 문화공의 영정(강원도 일반 도산문화재 510호)으로 한다. 해주문헌서원에 모셨던 최초의 영정은 연대로 보아 대략 1065부터 1075년 사이로 약 94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간 3~4회 정도의 重修(중수)와 模寫를 거처 온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음.

5. 화가의 선택
위원들은 몇 곳을 탐문하고 검토한 결과 변명희(서울대 미술대졸)화가로 정하고 작업을 주문하여 시작한지 7개월 만에 완성을 보아 지난 2015년 2월 7일 현지 오산서원 영당에 모셨음.

6. 정부의 국보급 등록이나 標準影幀(표준영정) 등록문제
國內 여러 문중에서 나름의 영정을 제작하여 정부의 표준영정으로 등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도 위 세분의 영정도 등록하려 해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당되는 영정은 오직 우리 노동서원의 두 분 영정을 국보급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시도할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은 노동서원과 강원도청이 추진하고 대종회에서는 측면에서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영정대책소위원회 사업진행 경과내역

1. 영정제작 개요
2013년 12월 20일 제70회 운영위원회에서 오산 문헌서원과 전국의 서원, 영당에 모셔진 문헌공, 문화공 영정이 서로 달라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자는 의견이 모아져 이를 전담할 영정대책소위원회 구성을 결의하여 승군 대종회장, 강훈 고문, 창섭 수석부회장, 대식 부회장, 병환 부회장, 공재 부회장, 영수 부회장, 현진 자문위원, 영철 사무총장, 동석 운영위원 등 10명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 작가 선정
서울대학교와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동양화과에 출강중인 비영리법인 한국조형예술연구소 소장인 변명희 작가를 선정하였다.

3. 영정 제작 방향
◾ 해주 문헌서원 영정을 계승한 홍천 노동서원의 영정을 기본영정으로 새로 모신다
◾ 기본 영정대로 전통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입상으로 모신다
◾ 문헌공, 문화공, 문장공 세분의 영정을 모시며 문장공 영정은 문헌공, 문화공 영정을 기반으로 새로 모신다.
◾ 대종회의 재정상태를 고려하여 제작비는 5,000만원 이내에서 추진한다.
◾ 영정은 우선 대종회기금으로 제작하고 선조님의 영정을 모시는데 후손으로서 뜻을 함께한다는 취지에서 찬조금을 접수받고 이를 기리기 위한 영정봉안비를 문헌서원 영정각 경내에 설치하는데 봉안비의 규모상 찬조금은 100만원 이상으로 한다.

4. 영정 제작 과정
◾ 2014년1월6일부터 6월24일까지 작가선정을 위한 답사, 면담과 회의소집 등을 실시함.
◾ 2014년 2월 24일 홍천 노동서원을 방문하여 영정제작에 대하여 설명하고 협조를 구함.
◾ 2014년 6월 25일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변명희 작가와 영정제작 계약을 체결함.
◾ 2015년 1월 21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정부표준영정 심의위원회의 영정심의에 참여함.
◾ 2015년 1월 31일 오산 문헌서원의 기존영정을 철거하였음.
◾ 2015년 2월 7일 변명희 작가가 완성한 영정을 영정대책 소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산 문헌서원 영정각 영정좌대에 재설치를 완료하였음.
◾ 2015년 2월 16일 대종회는 변명희 작가와 영정 제작완료 확약서를 교환하였음.(영정 제작비 총액 오천만원 완납)
◾ 2015년 3월 17일 오산 문헌서원 영정각에서 影幀奉安祭와 영정제작의 의미와 영정제작 헌찬내역을 기록한 文憲公影幀奉安碑 제막식을 개최하였음.
◾ 2015년 4월 26일 오산 문헌서원에서 제24회 문헌서원대제를 새로운 영정을모시고 봉행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