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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석 문안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 선생 연보(年譜)

984년(고려 성종3) 황해도 해주(海州) 대령군 호장(戶長) 최온(崔溫)이 규성(奎星) 별자리가 환하게 빛나는 태몽을 꾸고 아들이 탄생하니 이름은 충(冲), 자(字)는 호연(浩然), 호(號)는 성재(惺齋) 월포(月圃) 방회재(放晦齋),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으로 풍모는 석대(碩大)하고 성품은 굳세며 행실은 곧았다.

1005년(목종8, 22세) 갑과(甲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서경 장서기(西京 掌書記)에 임명되다.

1011년(현종2, 28세) 수제관(修制官)으로 보임되어 있다가 거란군과의 2차 전쟁에 참여하여 좌복야(左僕射) 직임을 받다. 다음해 우습유(右拾遺)로 승진하다.

1013년(현종4, 30세) 수찬관(修撰官)으로 거란군의 침입으로 불에 탄 역대 문적을 편수하고 태조부터 목종까지 7대 실록을 편찬하다.

1020년(현종11, 37세) 중서문하성 기거사인(中書門下省 起居舍人)에 임명되다.

1024년(현종15, 41세) 중추원직학사(中樞院直學士)에 임명되다.

1025년(현종16, 42세) 한림학사 내사사인(內史舍人) 지제고(知制誥)로 임명되어 왕의 명을 받아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비문을 짓다. 거돈사는 소실되었으나 탑비(塔碑)는 현존하여 대한민국 보물 제78호로 지정되다.

1026년(현종17, 43세) 한림학사 지공거(知貢擧)로 과거시험을 주관, 갑과 최황 등 2명, 병과2명, 동진사과 7명, 명경과 1명을 선발하다. 같은 해 4월 왕명을 받아 직산 홍경사 비문을 지은 공로로 태자중윤에 오르다. 홍경사는 소실되었으나 비갈은 현존하여 대한민국 국보 제7호로 지정되다.

1030년(현종21, 47세) 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에 임용되어 현종의 왕자(德宗 靖宗 文宗)들을 가르치다.

1031년(현종22, 48세) 현종이 승하하자,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선정을 베푼 22년의 치적을 찬양하는 명문을 지어 공표하다.

1033년(덕종2, 50세)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제수되었다가 4월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로 제수되어 설원(說苑)의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자사(刺史) 육조령(六條令)을 관청에 게시하다.

1034년(덕종3, 51세)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임명되어 법률, 소송, 형옥을 관장하다.

1035년(정종1, 52세) 중추형부상서(中樞刑部尙書)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임명되어 과거시험을 주관, 김무체 등 15명의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다.

1037년(정종3, 54세) 참지정사(參知政事) 수국사(修國史)에 올라 현종과 덕종의 실록편찬을 감수하다.

1040년(정종6, 57세)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국정운영의 중요 현안을 왕에게 건의하여 시행하다.

1041년(정종7, 58세) 판서북로병마사 상서좌복야(判西北路兵馬使 尙書左僕射)로 중용되어 북쪽변방 천리장성의 기틀을 구축하다. 이때 왕이 문무겸전(文武兼全)장군이라 치하하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등용하다.

1043년(정종9, 60세)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 문하시랑(守司徒 修國史 上柱國 門下侍郞)에 오르다.

1047년(문종1, 64세)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등용되어 법관들을 불러 모아 율령을 제정하여 반포하다. 이 무렵 제정된 법률은 공신을 위한 공음전시법, 세금을 면제하는 재면법, 세금을 감면하는 담험손실법, 노약자를 우대하는 구휼법, 중죄인을 심문할 때 3인의 형관이 공정한 재판을 심의하는 삼원신수법을 공표 시행하니 나라가 안정되다.

1049년(문종3, 66세) 문하시중 수태보(守太保)에 임명된 후 다음해 사추충찬도공신(賜推忠贊道功臣)이 되다. 이때 최충은 나라의 元老, 老人, 義士, 節婦를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어 음식을 대접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폐인, 병자, 봉양해 줄 이가 없는 사람들을 편안히 보살펴 근심이 없도록 하는 복지정책을 실현하다.

1050년(문종4, 67세) 도병마사 문하시중으로 서북지역의 휼민대책을 건의하고 국경을 침범하여 구금된 여진의 추장 염한(鹽漢) 등을 석방하여 여진과의 친선외교를 도모한 공으로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 守太傅)에 오르다.

1053년(문종7, 70세) 퇴직을 청했으나 문종의 교시는 [문하시중 최충은 누대로 내려오는 선비들의 영수이며 삼한의 덕망 높은 어른이다. 이제 비록 은퇴하기를 청하나 내 어찌 그 청을 허락하랴!,주관 부서에서는 마땅히 전래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편한 의자와 지팡이를 주어 나라 일을 계속 보게 하라] 명하여 시중(侍中)의 직무를 계속하다.

1055년(문종9, 72세)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致理功臣)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사 겸 문하시중 상주국(上柱國)으로 퇴임(致仕)하다. 퇴임 후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창설하고 신분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선발하여 유학교육에 진력하다.

1058년(문종12, 75세) 국가 중요정책이나 군국대사를 자문(諮問)한 공로로 문종이 공에게 예물로 포상하며 [그대의 뛰어난 계책을 채납하여 백성들을 문명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무궁한 국운이 흥성되었도다]는 관고(官誥)를 내리다.

1065년(문종19, 82세) 문종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 중서령(中書令)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상주국(上柱國), 양평부원군(楊平府院君)에 봉(封)하고 치사(致仕)를 선고(宣誥)하다. 이로써 다섯 임금을 섬기며 60여년간 벼슬하며 재상(宰相)으로 14년, 수상(門下侍中)으로 9년 자문관(諮問官)으로 5년 동안 문덕(文德)으로 왕도 정치에 헌신진력(獻身盡力)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이루다.

1068년(문종22, 85세) 음력 9월 15일 향년 85세에 서거하시다. 백성들의 조문은 [만복을 누리며 문덕을 베푸시고 승천하셨다]하고 문종의 조문은 [그대의 아버지는 봉황처럼 뛰어난 인물로 나라에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해주었도다.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만한 높은 학문을 지니고 일찍부터 대신의 지위에 올랐으며 우수한 계책을 세워 정책을 보좌하였으니 공의 업적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시법(諡法)에 의거 시호를 문헌(文憲)으로 정하고 정종묘정에 배향하다. 공은 유학 교육에 진력하여 유능한 인재를 연이어 배출하니 동방학교의 흥성이 시작되고, 성현의 가르침이 성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이루는데 공헌하니 사학의 시조로,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해왔다.


‘海東孔子’ 칭호의 유래

중국의 공자는 교육을 통하여 인문(人文)을 개화하고 학문의 보급을 보편화 대중화하면서 춘추(春秋), 예기(禮記) 등의 편찬 기록과 고증을 근거로 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문명의 시대를 열어 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조 최충 선생은 공자의 유교무류(儒敎無類)의 교육정신을 계승하였는데 이는 관학에 얽매이지 않는 사학을 설립하여 누구나 뜻이 있으면 다 배울 수 있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천하였다. 또한 교육을 받는 대상을 귀족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평민들에게 개방한 것은 당시의 고려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쾌거였다.

최충 선생은 현종, 덕종, 정종, 문종의 왕조(王朝)에서 60여 년 간 문덕정치(文德政治)를 실현하여 백성들을 문명(文明)시키고 평화롭게 만들었다. 치사(致仕) 후에는 유학(儒學)을 일으키는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후진들을 불러 들여 열심히 가르치니 문학으로 우수한 인사들이 배출되어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려는 시서와 예절을 갖춘 동방예의지국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최충 선생이 서거하자 문종은 조문에서 백성들이 문명(文明)하는데 초석이 되었음을 추모하며‘임금을 도와 울타리처럼 든든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공자가 돌아가신 것 같이 슬프다’라고 애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의 사람들은 사학의 시조(始祖)인 최충 선생을 중국의 공자에 비유하여‘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부르게 되었다. 해동공자라는 칭호는 공자를 추종하기만 한 것이 아닌 최충 선생의 교육이념과 실행에 있어 공자와 비견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학의 시초 九齋學堂 설립

고려 건국초기에는 유학교육을 미처 일으키지 못하였고 광종(光宗)이 문학을 진흥시키려 하였으나 고려의 문학은 화려한데만 치우쳤다. 그 후 거란의 계속된 침략으로 민생이 피폐(疲弊)할 때 고려사회는 문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이때 최충 선생은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자 우리 역사상 최초의 사학인‘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어 수 많은 인재를 육성하여 고려시대 학문을 크게 꽃피웠다. 최충 선생은 그 성품이 청렴 결백하고 솔선수범하였기에 구재학당을 설립하게 된 교육 철학도 성인을 좋아하고 흠모하며 성인을 본받게 하는 신유학에 기저한 인성교육에 있었다. 그리고 인간교육을 지향하였기에 구재학당의 설립 취지도 인간의 내재된 심성을 존양하고 유학의 도덕적 실천을 표방해 사회정화를 선도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데 있었다. 교육내용은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 등 아홉 개의 학당을 두고 생도들에게 구경과 삼사(九經三史)를 가르쳤다. 이는 인간의 내재적 심성을 인격도야로 지향하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수행적 인성, 도덕적 인성, 사회적 인성을 고양시킨 교육이었다.

또한 인격도야(人格陶冶)를 위해 시부사장(詩賦詞章)을 가르치고 글을 짓는 방법으로 각촉부시(刻燭賦詩)를 실시하니 과거에 응시하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학도들이 차고 넘치었다. 이 시기에 이를 모방한 유학자 정배걸의 홍문공도 등 11개의 사숙(私塾)도 연이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고려의 12공도 중에 유능한 인재가 연이어 배출되어 가장 흥성(興盛) 한 곳은 구재학당이었다. 문헌공도의 학맥은 김양감, 최사추, 김인존, 윤관, 최윤의, 윤이언, 김부식, 최홍윤, 이규보, 최자, 이색, 정몽주,정도전 등에게 계승되어 고려 전기부터 시작된 문헌공도는 조선의 근간이 되는 유학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자녀교육을 위한 계이자시(戒二子詩)

최충 선생은 벼슬길에 오른 유선(惟善), 유길(惟吉) 두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선비가 권세로 출세하면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이 드물고 문덕(文德)으로 영달해야 경사가 될 것이다. (士以勢力進 鮮克有終 以文行達 乃爾有慶)이라 훈계하고 계이자시(戒二子詩)를 지어 실천하도록 당부했다. 이 시(詩)는 후손은 물론 후학들에게도 정신적 규범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吾今戒二子(오금계이자) 내가 두 아들에게 훈계하노니
付與吾家珍(부여오가진) 우리 집안의 보배로 삼아라
淸儉銘諸己(청검명제기) 청렴하고 검소함을 각자 몸에 새기고
文章繡一身(문장수일신) 문장으로 몸을 장식하여라
傳家爲國寶(전가위국보) 집안에 전하여 나라에 보배가 되고
繼世作王臣(계세작왕신) 대를 이어 어진 신하가 되어라
莫學粉華子(막학분화자) 사치와 허영을 배우지 마라
花開一餉春(화개일향춘) 꽃은 봄철 한때 피느니라

家世無長物(가세무장물) 집안에 전하는 귀한 물건은 없으나
唯傳至寶藏(유전지보장) 오직 지극한 보배로 간직하여 전하라
文章爲錦繡(문장위금수) 문장으로 부귀(錦繡)를 누리고
德行是珪璋(덕행시규장) 덕행으로 공명(珪璋)을 이루어라
今日相分付(금일상분부) 오늘 너희들에게 분부하노니
他年莫敢忘(타년막감망) 두고두고 감히 잊지 말도록 하라
好支廊廟用(호지랑묘용) 나라에 좋은 동량으로 쓰여 공헌하면
世世益興昌(세세익흥창) 대대로 더욱 흥하고 창성하리라


문헌서원(文憲書院)의 유래

문헌(文憲)이란 최충의 시호로서 학문과 도덕을 펼친 공덕을 문[文]이라하고, 다능(多能)하며 법률을 고정한 공덕을 헌[憲]이라 하였다. 문헌서원은 문헌공 최충 선생과 문화공 최유선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고려 때부터 황해도 해주 신광천 위에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1550년(명종 5년)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과 해주목사 정희홍이 문헌서원을 해주 향교 서편으로 옮겨 영정을 모시고 조선 명종의 윤허를 받아 제향을 올리던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다.

- 주세붕의 제문 -
옛적 고려가 나라를 세운지 150년이 지난 시기에 사람들은 사욕에 가득 차 있었고, 하늘의 이치는 아득하기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이를 슬퍼하여 공을 우리나라에 보내주셨습니다. 도덕으로 몸을 장식하셨고, 패술(覇術, 권세로 군림함)을 배척하시며 왕도를 주창하셨습니다. 그리고 학도를 육성하니 문학엔 선비가 가득하였습니다. 마침내 속세를 떠나 후련히 옷자락을 하늘로 날려 학을 타고 다시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거처하시는 집을 가지고 학교를 세우시니 구재(九齋)로 인하여 유학이 증진되었습니다. 수양산은 높고 높고, 서해는 넓고 넓으며 성묘는 의연함이 있습니다. 공이 가신지 480년! 저는 백발을 흩날리며 공의 고장을 찾아왔습니다. 마루 위에 모신 공의 화상을 뵈옵고 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합니다. 향기로운 제물로 정성을 올리오니 용(龍)과 봉(鳳)을 타고 내려오셔서 저의 술잔을 받아 주소서.

- 조선 고종의 치제축문(致祭祝文) -
1909년 기유(己酉) 정월 고종황제의 거동(擧動)이 서도(西道)를 순시(巡視)하실 적에 [고려 태사(太師) 문헌공 최충은 학교를 진흥시키고 국력을 배양하였으니 그 풍성한 공훈과 탁월한 업적은 천년 동안 크게 감탄하는지라 그 묘지를 방문하여 수리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술잔을 올려라]는 고종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가선대부 규장각 전제관 김유성(嘉善大夫 奎章閣 典製官 金裕成) 이 축문을 지어 바치었다.